어느 순간부터 우울과 무기력을 느끼고 있었다. 업무는 하루에도 여러 번 전환되었다. 나중에 창업하려면 이렇게 다양한 역할을 하는 게 필요하다는 생각에 지금 팀에 조인했지만, 계속 일할수록 몰입하는 절대 시간은 줄고 있었고, 그로 인해 삶의 만족도가 떨어지고 있었다. 뭘 하긴 하는데 제대로 하는 것 같지 않은 찜찜한 기분의 연속이었다.
동시에 내 본업인 프로덕트 디자이너로서 내가 잘하고 있는지, 성장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도 했다. 복잡한 제품을 잘 다룰 줄 알아야 한다는 생각을 어렴풋이 하고 있었는데, 지금 팀에서는 이미 내가 예전부터 하던 일의 연장선인 일들을 많이 해 오다 보니 설계가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다. 어려운 일을 해야 성장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러지 않고 있다는 생각에 살짝 조바심이 났다.
삶의 변화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그런 와중에 팀의 동료분이 퇴사한다는 이야기를 전해 주셨고, 나도 크게 영향을 받고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지난 내 2년 동안의 삶을 되돌아봤다.
레거시 없는 제품을 만드는 일은 재밌었다. 날개 단 듯 빠르게 달릴 수 있었다. 그리고 정말 좋은 사람들을 만났다. 지금까지 회사에서 경험해 보지 못한 특별한 강점을 느꼈다. 좋은 사람들일 뿐만 아니라 팀워크도 좋았다. 모두가 하나의 목표를 보고 달려가고 있어서 결속력이 정말 단단했다. 모두가 내 제품이라 생각하며 일했고 열정도 넘쳤다. 당연히 티키타카도 잘 통했다.
물론 늘 좋은 일만 있던 건 아니다. 처음에 언급했듯이 개인적으로는 삶의 만족도와 디자이너로서의 성장에 회의감이 있었고, 아무리 제품에 힘을 쏟아도 유통이나 마케팅을 잘하지 못하면 사용자들에게 관심받기란 쉽지 않다는 냉혹한 현실을 마주하기도 했다. 제품 팀이 아닌 다른 부서와의 협업이 쉽지 않은 부분도 있었다. ‘을’일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툴이 된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도 많았다.
이직을 시도해 보기로 결심했다. 근데 무서웠다. 1N 연차가 된다는 건 참 부담스러운 일이다. 같이 일해봐야 진짜 그 사람을 평가할 수 있지만, 그럴 수는 없기 때문에 주로 연차로 자연스럽게 이정도는 할 거라는 암묵적인 기대가 있고, 그 기대가 부담스러웠다.
회사에 다니며 다른 회사에 제대로 지원해 본적이 없었다. 늘 회사를 그만두고 이직을 준비했기 때문에 시간이 부족하고 답답했다. 또 레퍼런스로만 이직하다 보니 제대로 된 포트폴리오를 만든 게 9년 전이었다. 그래서 이번에 포트폴리오를 최근 회사 위주로 정리하는 작업만 하는데도 주말 내내 12시간씩 앉아 있어야 했다(다들 어떻게 환승 이직을 하시는 거죠?).
그렇게 만든 포트폴리오로 관심이 있던 차에 먼저 링크드인에서 연락 온 곳, 이전에 티타임할 때 좋은 기억이 있어서 먼저 연락한 곳, 비즈니스를 많이 시도해본 경험이 있는, 새 제품을 만드는 곳 이렇게 세 곳의 면접을 진행하게 되었다.